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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이후

* 53,868자 * '오월', '유월', '칠월', '팔월' 이후의 일입니다. 늦은 밤 인적이 드물어진 호숫가 근처의 식당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으면서 주방이나 문간의 작은 기척에도 스가와라는 일일이 놀란 눈을 하고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다니까.” 오이카와가 테이블 아래로 스가와라의 손을 꼭 쥐었다. 스가와라가 열없이 웃...

*68,090 묵직한 원목의 문을 겨우 밀고 들어가자 바의 안에서 잔을 닦던 나카타가 씨익하고 웃으며 반겼다. 스가와라는 늘 앉는 자리가 비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한 후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아직 가게의 손님은 저 하나뿐인 듯 했다. 하긴,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시간이긴 하지. 스가와라는 습관처럼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아...

'칠월' 이후

*57,381자 *'오월', '유월', '칠월' 이후의 일입니다. 술잔이 비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오랜만의 회식에 모두가 들뜬 듯 고성과 웃음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그 속에 끼어 여기저기서 부딪혀 오는 술잔에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익숙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일 년에 두 번 행해지는 사장 주관의 전...

'유월' 이후

*33,978 *'오월', '유월' 이후의 일입니다. 시원한 실내에서 나와 한걸음 내딛자 기다렸다는 듯 아찔한 햇살이 왈칵 머리 위로 쏟아졌다. 스가와라는 본능적으로 한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더위에는 꽤 강한 편이지만 햇살에는 또 그렇지가 못했다. 그대로 선 채 잠시 눈을 감고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킨 뒤 그가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떴다. ...

*11,871 조그맣게 오므린 아랫입술을 하얗고 고른 윗니가 잘근잘근 씹는다. 필기를 할 때면, 아니 뭔가 집중을 할 때면 종종 나오는 버릇이다. 그러면 이내 입술은 빨갛고 통통하게 부어오르고, 그게 불편해지면 또 작은 혀끝을 살짝 내밀어 입술 표면 위를 가만가만 더듬는다. 그대로 쓱쓱 몇 글자를 더 써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도톰한 눈썹이 이마 근육을 따라...

'오월' 이후

* 20,144 * '오월' 이후의 일입니다. “쉬겠다고?” 스가와라의 말에 후지오카 주임이 하던 것을 멈추고 안경을 이마로 밀어 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 “별일이네, 스가와라 군. 좀 쉬라고 그렇게 사정을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무슨 일 있어?” 옆에서 듣고 있던 스다 과장까지 목을 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요, 별일은 아니고……. 그냥...

“그럴 때가 있잖아요.” “어떤?” “당연하게 해왔던 일들이 문득 의심스러워질 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지금 이걸 하는 건 과연 맞는 일일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 때.” “흐응…….” “뭐에요, 그런 반응. 마치 그런 일 잘 모른다는 것처럼.” “이라기보다, 의외네. 토비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그런 생각도 하는 ...

* 17,277 오월을 좋아한다. 열두 달 중에 제일. 높고 파란 하늘이 좋고, 여름을 가져 오려고 은근히 날을 데우는 것도 좋다. 길에 늘어선 나무 이파리들이 묵직해지는 것도 좋고, 올려다 보면 눈이 부셔 머리가 아뜩해지는 것도 좋다. 스가와라는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을 향해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목에 대충 두른 땀수건이 팔랑댔...

*4,844 아, 집에 돌아왔나 보네, 토비오. 오랜만에 여기서 불 켜진 네 방을 올려다 보고 있으니 오늘도 연습은 열심히 했는지, 어디 아픈 덴 없는지, 저녁은 든든히 먹었는지 그런 생각해보나마나 한 것들이 또 궁금해진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는데 이불은 따뜻한 걸로 꺼냈는지, 방에 난방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걱정이야. 이런 잔소리를 하면, 저는 몸에 열...

*4,881 운동복이나 교복이 아닌 옷을 입은 카게야마를 보는 것은 역시나 좀 어색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오렌지 주스에 꽂힌 빨대를 쪽쪽 빨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얼굴로 도대체 왜. 스가와라는 다시금 하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 온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히나타를 비롯한 ...

*10,785 스가와라는 짜증이 났다. 요 며칠 계속해서 그랬다. 다이치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그 짜증이 조금 덜해졌다가, 다이치가 눈 앞에 나타나면 더 많이 나고 하는 그런 식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다이치는 늘 그랬듯이 스가와라가 멀리서부터 보일라 치면 그 큰 손을 들어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늘 그랬듯이 어딜 가든 스가와라의 옆에 서서 걸었고, ...

*20,627 * 좁은 화장실에 갇힌 채 스가와라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제멋대로 뛰는 가슴은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슬아슬하게 잇고 있었던 관계를 이제 정말 끝내야 할 때가 이런 식으로 와버렸다고 그는 생각했다. 보고 싶어. 모순적이게도, 그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그의 얼굴...